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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승! 그는 무슨생각을 하였는가!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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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상을 노래하자! 작성일10-02-08 13:09 조회2,4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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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승! 그는 무슨생각을 하였는가!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는 80년대 기독교문화예술운동을 통해 예수의 정신을 우리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이호승님은 문화예술이 곧 정신이라고 보고 정신이 살아있어야 예수의 본 뜻이 우리사회에 확산되리라고 생각하였다. 토인비가 말한것처럼 문화예술이 살아있는 민족은 번성하였다는것을 이호승님은 믿고 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정신이 우리사회에 확산되려면 기독교문화예술이 발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교회가 부흥되고 대형화되면서 교인은 늘어나지만 예수의 정신은 확산되지 않고 자기 교회만을 위해 봉사하는것으로 그치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하였다.그는 예수의 말씀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희생하여 하나님을 전하라는것으로 믿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교회가 늘어나는데에도 우리사회의 사회적약자와 그늘진 곳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는것에 대한 고뇌를 하게 되었고 이는 교회에 기독교문화예술부문이 별로 없고 관심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여 기독교문화예술운동을 통해 교회문화예술진흥 활동을 하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85년도에 분당으로 이사를 하였다.

-89년 분당이 개발되면서 이호승님은 분당지역에 주거하는 주민4,300여세대(세입자 2,700여세대)들의 재산권 침해와 주거권 특히 2,700여 세입자들의 주거권이 침해되면서 철거민운동가로 변신하였다.

-89년말부터 90년초까지 세력을 규합하여 분당세입자대책본부를 결성하였다.

-당시의 철거민들은 도시빈민이 대부분이어서 종교기관이나 대학운동권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투쟁하였으나 이호승님은 철거민들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며 시민자구운동(랄브네이더의 미국 소비자운동과 토마스뮌처의 독일농민운동을 접목)을 창안하여 자주적인 철거민운동을 시작하였다.

-분당세입자투쟁은 이런 이호승님의 생각으로 엄청난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주민들의 희생(죽거나 구속 그리고 중경자 발생)은 별로 없었고 상대적으로 정책적대안이 절실히 요청되도록 하여 분당세입자들에게는 주거생존권(①형편에 맞는 임대아파트 ②가이주단지 ③생계대책용 상가권리)을 얻어내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이호승님의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분당에서 이호승님이 없었다면 손쉽게 세입자들을 내쫓을수 있었다는 권력과 자본의 판단은 님에게는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권력과 자본은 개발과정에서의 철거민은 장애물로 보는 시각이었는데 이호승님은 철거민은 개발의 장애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개발관련법과 제도의 제,개정을 주장하면서 개발관련법과 제도가 잘못(①사업시행처가 마음만 먹으면 공익이라는 구실로 사유재산을 침해할수있다.②사업시기및 강제철거등을 사업시행처가 일방적으로 결정할수있다.③개발지역에서 살고있던 주민들의 개인과 가족의 삶의질과 지역공동체문화등 개발지역주민들의 사회문화활동에 대한 배려가 없다.④개발은 주로 낙후된 지역을 하게 되는데 주거약자 즉,세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며 이들의 의견은 듣는 창구가 없다.⑤철거민을 돕는 활동가들을 적대시하며 개발 사업시행처를 지방행정관서와 경찰측이 일방적으로 지원하도록 되어있다.등등)되었는데 이같은 법과 제도로 추진되는 개발에서 발생될수 밖에 없는 철거민은 개발사안과 지역적 특색에 맞춰 정책적대안으로 대책을 수립한후 생업으로 복귀시키는 철거민운동을 하게 되었다.

-님은 분당투쟁을 승리로 이끈후 그는 철거민들의 희생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경기도철거민협의회(1992년10월24일 경원대학교 대운동장에서 창립대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 하여 초대회장이 되어 남다른 지도력을 보여 줬다.

-님이 개발한 철거민운동방식으로 경기도철거민협의회(약칭:경철협)는 당시 윤세달 도지사에게 지방자치단체에서 강제철거를 할때 지역철거민대책위원회와 일정부문 협의를 하라는 지도공문을 받아내는등 지역철거민들이 가능한 빠른 시일에 희생없이 대책을 수립하도록 하는데 님의 지도력은 뛰어났다.경철협의 소속 지역대책위원회는 대책이 수립되는 시기가 단축되었고 이같은 소식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호승님은 개발관련법과 제도의 제,개정을 위해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전국단위의 철거민단체인 전국철거민협의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여(1993년4월30일 서울 성문밖교회에서 창립발기인총회,1993년6월28일 서울장충단공원에서 창립대회)초대회장으로 전철협이 오늘에 이르기 까지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하였다.

-전철협이 1996년부터 경실련,환경운동연합등과 함께 한국시민단체협의회에 참여하여 사회공동선 추구에 함께 하도록 하였으며 2001년 참여연대등과 함께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활동을 전개하는데도 기여하였다.

-2004년도에는 서민들이 나라를 바꾼다.라는 슬로건으로 철거민,신문판매인,5일장상인,노점상,대리기사단체들을 규합하여 서민의힘을 창립하였고 현재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2005년도에는 뜻있는 교수및 시민활동가들과 함께 토지정의를 위해 “토지정의시민연대”공동대표로 활동을 하다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되기전 사퇴하였다.

-89년부터 분당에서의 탄압은 2000년 들어서 그가 살고 있던 판교에서도 계속되어 2004년도에 구속되었으며 2005년 11월2일 살고있던 비닐집이 강제철거되었고 2006년11월2일 전철협 회원164명이 올바른 판교개발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연행되었는데 이를 배후조종하였다며 온갖 탄압을 가하였다. 이때에는 매년 서너차례의 출두요구서 등이 남발되었다.

-이때에 이호승님은 전철협의 지도위원으로 2006년9월에 만든 사단법인 터사랑소비자생활협동조합 이사장으로서 생협운동에 전념하고 있을때였다.

-결국 이호승님은 분당경찰서앞 사건으로 그동안 탄압의 강도가 더 높아져 어떻게 할수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님은 2008년도에 모친이 별세하였고 부친이 중환자실에 있는등 가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던 시기였다.

-그는 생협운동등 모든 활동을 포기하고 역량을 모아 새로운 정치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뜻있는 시민운동가들과 규합하여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였고 2007년 7월29일 경기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009년 2월 민주당 경기도당위원장으로 임기를 마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후임으로는 박기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뒤돌아 보면 이호승님의 뜻을 왜곡하고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려는 세력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의 실세이며 권력의 핵심부였고 이들이 정치,경제,사회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이호승님은 조직적으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님이 2007년도,2008년도에 겪었던 고난에 함께하지 못한 우리는 늘,마음 한구석에 님에 대한 부채가 남아있는것 같았다.

-이호승과 함께하는 까페는 이런 이호승님의 뜻이 2007,2008년 사건으로 굴절되지 않고 올곧게 우리사회에 널리 알려나가고자 이호승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곳이다.

-이호승님의 주장은 토지와주택이 삶의보금자리로서 자리매김을 해야지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약자들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하며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분당개발로 가족공동체가 무너졌지만 다른 사람들의 가족공동체를 지키기위해 무한희생을 감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가 창립을 주도하였거나 창립에 관여한 모든 단체들이 이같은 그의 뜻과 일치하고 있다.

-그는 돈을 벌려고 했거나 혼자 잘살려고 한것이 아니다. 만일 잘살려고 했다면 벌써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80년대 초반부터 그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사회에 실철될수 있도록 기독교문예운동을 주도 했으며 89년부터 하나의 밀알이 되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해 오고 있는것이다. 지금까지 이호승님은 토지와주택 시민운동가로서 그가 겪었던 고난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뜻을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사회에 널리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는것이다.

-권력과 자본이 이같은 이호승님의 뜻을 짝퉁철거민들과 부화뇌동하고 왜곡하여 파렴치범으로 몰고간 2007년도 사건에 대해 역사적 진실은 말할것이다. 무엇 때문에 분당과 판교에서 이호승님을 매도하고 탄압하였는지 분명히 밝혀 질것이다. 2007년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은 우리의 훌륭한 지도자에게 상처를 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호승님의 손길이 필요한 계층과 부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것이다.

-우리는 2007년 사건으로 상처를 받은 이호승님이 상처를 어루만지며 더욱 힘을 내라는 뜻에서 “이호승과 함께”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호승님의 안녕도 중요하지만 이호승님의 뜻이 왜곡되는것에 대한 우려가 있기에 님의 뜻이 올바르게 여러사람에게 전달되어 우리사회발전에 기여하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카페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이호승님을 격려하고 님의 뜻이 전파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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